[사진=대한민국 법원 홈페이지 갈무리][헬스코리아뉴스 / 이순호] 탈모치료제 제네릭의 위탁생산(CMO) 계약을 맺은 뒤 불과 수개월 만에 꼼수로 계약을 파기하고 '제조소 갈아타기'를 시도한 제약사가 수십억 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3민사부는 최근 영일제약(원고)이 휴비스트제약(피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휴비스트제약은 영일제약에 21억 5000만 원 및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이번 사건은 의약품 판권 양수도 및 위탁제조 과정에서의 신의성실 원칙과 제네릭 제조소의 독점적 권한을 법원이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판례가 될 전망이다.
'20원의 유혹'에 무너진 신뢰 … 징검다리 전략의 부메랑
영일제약은 당초 독립바이오제약과 위수탁 계약을 맺고 피나스테리드 성분 남성 탈모치료제인 '피나온정'을 생산해 공급해 왔다. 독립바이오제약은 이 제품을 판매사인 라온파마에 납품하는 유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24년 1월 휴비스트제약이 독립바이오제약으로부터 피나온정의 품목허가권을 양수하면서부터다. 영일제약은 수탁제조자로서 휴비스트제약이 원활하게 허가 변경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자사의 기존 제출 자료를 원용하는 데 동의했고, 이후 3사의 협의는 발 빠르게 진행됐다.
휴비스트제약은 2024년 1월 23일 라온파마와 피나온정을 1정당 131원에 공급하는 판매계약을 맺었다. 계약 기간은 2033년 1월 18일까지 약 9년이며, 연간 최소 구매 수량은 2000만 정으로 보장됐다. 이어서 2024년 2월 26일 생산처인 영일제약과 공급단가를 1정당 120원으로 정하고, 계약 기간을 3년으로 하는 의약품 제조 위수탁 본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하지만 겉보기에 순조로웠던 이 3자 간의 계약 이면에는 단가를 더 낮추기 위한 휴비스트제약의 은밀한 '이중 플레이'가 숨어 있었다.
휴비스트제약은 영일제약과 본계약을 맺기 약 한 달 전인 2024년 1월 30일, 이미 유니메드제약과 1정당 100원의 단가로 또 다른 제조위수탁계약을 몰래 체결한 상태였다. 유니메드제약과의 단가는 이후 출고 수량에 따라 90~95원까지 더 낮아졌다.
즉, 휴비스트제약은 애초에 3년의 계약 기간을 유지할 의사가 없었으면서도, 유니메드제약으로 수탁 제조소 변경 허가를 받는 데 필요한 약 8개월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영일제약을 일종의 징검다리로 이용한 것이다.
휴비스트제약이 유니메드제약으로 제조소를 변경하기 위한 행정 절차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영일제약은 "수탁제조소 변경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라며 절차 중단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발송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자 휴비스트제약은 영일제약이 라온파마에 공급단가를 누설해 '비밀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기존 계약의 해지를 통보했고, 수탁 제조소를 유니메드제약으로 변경하는 품목 변경 허가까지 받아냈다.
재판부는 이 같은 휴비스트제약의 행태를 법리적으로 조목조목 꼬집으며 부당성을 따졌다.
"명시 조항 없어도 독점권은 본질" … 수탁사 보호한 법리 판단
우선 비밀유지 의무 위반 주장에 대해 법원은 "해당 공급단가는 영일제약, 휴비스트제약, 라온파마 3자간 협의를 거쳐 결정된 것으로, 이를 비밀 정보로 보기 어렵다"고 일축했다. 휴비스트제약 역시 사전 협의 사실을 알면서 계약을 맺었으므로 이를 비밀 정보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다.
소송의 또 다른 핵심적인 쟁점은 위수탁 계약서상 '독점 공급권'의 인정 여부였다. 휴비스트제약은 계약 협상 과정에서 영일제약의 독점적 제조권 및 위약벌 규정이 담긴 내용이 최종 단계에서 삭제됐으므로, 언제든 제조소 변경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맞섰다.
그러나 재판부의 시각은 달랐다. 의약품 위수탁 계약에는 본질적으로 수탁자의 독점적 공급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으로, 제약산업 내 전문의약품이 갖는 구조적 특수성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재판부는 "전문의약품은 복수의 제조소에서 각각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을 거치는 것이 막대한 비용 탓에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다"며 "1개의 품목허가에 대해 복수의 수탁 제조소를 동시에 등록하거나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비록 계약서에 명시적인 독점 조항이 빠졌더라도, 위탁자인 휴비스트제약은 수탁자인 영일제약이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적법한 인허가를 유지할 의무를 지니며, 이는 배타적·독점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 재판부의 확고한 결론이다.
재판부는 타사로 제조소를 변경한 휴비스트제약의 행위 자체가 영일제약의 지위를 상실케 한 명백한 계약 위반(이행거절)에 해당한다고 못 박았다.
실익 쫓다 21억 부메랑 … 위탁사 우월직 지위 남용 '경종'
재판부는 휴비스트제약의 이행거절에 따른 손해배상액 산정에도 명확한 수치를 제시했다. 피나온정 1정당 판매이익을 86원(공급단가 120원 - 생산원가 34원)으로 책정하고, 라온파마와의 연간 최소 구매 수량인 2000만 정, 그리고 잔여 계약기간 2.5년을 곱해 총 43억 원의 이행이익을 도출해 냈다.
다만 재판부는 영일제약이 기존 설비를 다른 위탁생산에 그대로 투입할 수 있는 점, 계약 조기 종료로 원자재 상승이나 분쟁 등 여러 사업상 위험을 피하게 된 점, 그리고 원고의 평균 영업이익률(30.7%) 대비 피나온정의 판매이익률(71.6%)이 이례적으로 높은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종 배상액을 이행이익의 50%인 21억 5000만 원으로 제한했다.
결과적으로 단가 20~30원을 깎아 이윤을 남겨보려던 휴비스트제약의 꼼수는 신뢰를 저버린 대가로 21억 원이 넘는 거액의 손해배상금으로 돌아왔다.
소송에서 패소한 휴비스트제약은 이러한 판결에 불복해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한 상태다. 영일제약도 항소장을 제출했는데, 손해배상 산정액이 50%로 조정된 것에 불복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차후 진행될 상급심에서도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수탁사를 징검다리로 이용하는 제약사의 '제조소 갈아타기'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 이어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