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중 마지막 공개석상에 선 저우언라이. /연합뉴스 제공 마오쩌둥 시대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는 수많은 중국인에게 존경받는 현대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20세기 동안 중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하는 장기적인 과정의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에 충성심을 보였다거나 정치적 목표보단 보신을 우선시했다는 비판도 있다.
저우언라이는 1921년 봄 공산당 입당 후 단 한 번도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적이 없었다. 특히 무수한 정적을 숙청했던 마오쩌둥 아래에서 그림자처럼 정치권력을 유지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연합뉴스 제공 최근 출간된 '저우언라이'(아르테)는 '2인자' 저우언라이의 삶을 그린 평전이다. 중국 현대사 연구의 석학 천젠 코넬대 명예교수가 그의 태생부터 죽음까지를 1천쪽 넘는 분량으로 담았다. 25년간 저우언라이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이다.
'저우언라이' 평전 책표지. /연합뉴스 제공 저우언라이는 어린 시절부터 출중한 수재였다. 톈진 난카이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을 거쳐 프랑스에서 공산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국공합작 시절에는 황푸군관학교에서 정치부 주임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당시 교장은 국민당의 이인자 장제스(蔣介石)였다. 장제스는 성실하고 꼼꼼한 저우언라이를 신뢰했다. 그러나 쑨원(孫文)의 사망으로 국공합작이 깨지자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와 대립의 길을 걸었다. 그는 상하이로 이동해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정보 총괄자에 임했다.
1936년 경. 말을 탄 저우언라이. /연합뉴스 제공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에서 행정 권력과 정보연계망을 제도화하며 권력을 닦았다. 탁월한 행정 활동으로 당원들의 지지는 물론, 세계 공산 세력 리더격이었던 스탈린의 주목도 받았다. 대장정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마오쩌둥보다 당내 지위는 물론 지지기반도 넓었다. 마오쩌둥은 홍구(공산당 장악지역)에서 특유의 군사적 능력으로성공을 거두고 있었지만, 독단적인 데다가 잔혹해 악명도 얻고 있었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 /연합뉴스 제공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공격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면서 통제하려 했으나 일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당내에선 마오쩌둥을 내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애초 이를 주도한 이도 저우언라이였다. 다만 그는 마오쩌둥이 공산당 내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라 그는 판단했다.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장제스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이란 인물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오른쪽부터 저우언라이, 주더, 마오쩌둥. /연합뉴스 제공 대장정, 그리고 장제스와의 전투에서 마오쩌둥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장정과 내전은 마오쩌둥을 1인자로 올렸다. 마오쩌둥은 뒤끝이 있는 사람이었다. 홍구에서 저우언라이에게 당한 패배와 모욕을 평생 잊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27년간 총리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누렸지만, 여러 차례의 자아비판과 모욕, 숙청 위기를 겪었다. 그는 극도로 조심하면서 의심 많은 마오쩌둥의 시선을 견뎠다.
문화대혁명 당시. 왼쪽부터 장칭, 저우언라이, 린뱌오, 마오쩌둥. /연합뉴스 제공 마오쩌둥 고령이 되었지만 저우언라이를 끝까지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류사오치(劉少奇), 린뱌오(林彪), 왕훙원(王洪文), 덩샤오핑, 화궈펑(華國鋒) 등을 후계자로 내세웠고, 이들을 축출하거나 재등용하면서 교묘한 권력술을 사용했지만 저우언라이만은 평생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마오쩌둥은 그를 끝내 내치지 못했다. 그가 없이는 정부가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행정의 달인이었다.
저우언라이가 죽고, 마오쩌둥도 곧이어 사망하면서 저우언라이의 후계자 덩샤오핑이 권력을 차지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혁명적 노선을 폐지하고, 저우언라이의 실용주의와 현대화 전략을 계승했다. 죽기 전 저우언라이는 제4차 전국인민대회 연설에서 중국이 "산업, 농업, 국방, 과학기술 네 가지 영역에서 현대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덩샤오핑은 이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