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혁. /사진=강원FC
[Asports뉴스] 최연선 기자 = 한 편의 동화 같았던 무명 선수의 '인생 역전' 스토리가 단 한 번의 경솔한 말실수로 인해 최악의 파국을 맞이할 위기에 처했다.
지난 여름 북중미 월드컵부터 가을의 아시안게임까지 한국 축구 수비의 중심으로 떠올랐던 이기혁(26·강원FC)이 거센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으며 국가대표 커리어의 중대 기로에 섰다.
이기혁의 지난 몇 달은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다. 파울루 벤투 전 감독 시절 깜짝 발탁된 것을 제외하면 태극마크와 거리가 멀었던 이기혁은 지난 5월 홍명보 감독의 부름을 받고 극적으로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승선했다.
당시 K리그에서 보여준 탄탄한 활약과 주축 수비수 김주성(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갑작스러운 부상이 맞물려 빚어낸 천금 같은 기회였다.
이기혁은 체코,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맞붙은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해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한범(미트윌란)과 함께 든든한 스리백 라인을 구축해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상승세는 연령별 대표팀으로도 이어졌다. 이민성 감독이 이끄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24세 이상 '와일드카드'로 발탁된 이기혁은 주장 완장까지 차고 수비진을 진두지휘하며 한국의 금메달 획득을 견인했다.
월드컵 전 경기 선발 출전에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완벽한 축구 인생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화려했던 금자탑은 대회 종료 직후 스스로 내뱉은 한마디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 특례를 확정 지은 뒤 진행된 언론 인터뷰에서 해맑게 웃으며 "군대 안 갑니다"라고 내뱉은 발언이 치명적인 오점으로 작용했다.
며칠 뒤 국군체육부대(상무) 입대가 예정되어 있던 상황에서 나온 가벼운 언행은 국가대표의 무게감과 병역의 의무를 폄하했다는 국민적 분노를 촉발했다.
함께 출전했던 후배 양민혁(KVC 베스테를로)의 경솔한 인터뷰와 박승수(뉴캐슬 유나이티드 U21)의 전역모 사진 논란까지 겹치면서 선수단 전체의 태도 논란으로 번졌다. 귀국 직후는 물론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거듭 고개를 숙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태는 정치권과 사회 전반으로 일파만파 확산했다. 최근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이기혁을 비롯한 세 선수의 실명이 직접 거론되며 맹비난이 쏟아졌고, 대한체육회 차원의 윤리위원회 회부 및 중징계 요구까지 빗발치고 있다.
나아가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따른 병역 혜택 자체를 전면 재검토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강경한 여론이 국방부와 문체부 등 정부 부처의 제도 개선 움직임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더욱 뼈아픈 것은 이기혁의 A대표팀 재승선 가능성마저 희박해졌다는 점이다.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로베르트 모레노(스페인) 감독은 오는 29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중동 2연전(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명단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기혁. /사진=KFA
전임 홍명보호의 스리백 체제에서는 이기혁의 활용 가치가 높았으나, 모레노 감독이 부임과 동시에 포백 전술로 전환하면서 중앙 수비수 자리는 두 자리로 좁혀졌다.
현재 김민재와 이한범이 탄탄한 주전 조합을 굳힌 가운데, 왼발잡이 센터백 백업으로는 김태현(가시마 앤틀러스)이 낙점받아 지난 9·10월 A매치를 소화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상에서 회복한 김주성까지 J리그에서 맹활약하며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 모레노 감독으로서는 굳이 거센 비판 여론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술적 효용성이 줄어든 이기혁을 무리해서 발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불과 반년 전 무명에서 국가대표 주전 수비수로 신데렐라 스토리를 썼던 이기혁은 이제 국가대표 커리어의 명운을 장담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서 있다.
금메달의 기쁨에 도취해 내뱉은 단 몇 초의 실언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공든 탑을 허물어뜨리는 뼈아픈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yeonseon@asportstv.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