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이란의 석류, 그리고 우리교육의 인간만들기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이란의 석류, 그리고 우리교육의 인간만들기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2.01.19 11: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어느덧 또 한 해가 가고 새로운 임인년이 시작되어 사방 달력에는 호랑이를 찬양하며 호랑이의 용맹과 활력을 되새기며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그중에도 서울문화투데이 첫면에 앉아 포효하는 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린 호랑이 그림은 그 앞에 앉아 기쁜 소식을 알리는 듯 지저귀는 까치의 귀여운 모습까지,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

추위를 타는 나는 운동부족으로 건강을 해칠까봐 어쩌다 외출할 기회가 있으면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지하철역으로간다. 그 길거리에는 꽤나 다양한 가게들이 노점상을 방불케 과일들을 눈에 띄게 늘어놓는다. 그중에도 눈에 띄게 싱싱한 석류가 한 바구니에 10,000원이라고 붙어있어 한 바구니를 달라고 하니 석류 6개를 담아준다. ‘이란산 석류’인가 하고 물었더니 미국산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그 석류를 보고 이란에서 먹었던 달고 싱싱했던 석류를 기대했었기에 그 말을 듣고 좀 실망하였다. 그러면서 한국과 이란의 교역이 중지된 지 오래임을 상기했다.

그러면서 나는 2003년 2월, ITI(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 아태지역협회를 이란의수도 테헤란에서 3차로 개최하게 되어 초대를 받았던 때를 상기했다. 이란의 국내 연극 경연대회와 맞물려있어 볼거리가 많이 마련된 국제행사에 우리 ITI 아태지역협회 행사가 주축이 된 듯했다. 부푼 호기심을 안고 참석한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아주 싱싱하고 새콤달콤하면서도 특별한 싱싱함을 풍기던 이란의 여러 풍요로웠던 과일들이 입 속에 침으로 고여왔다.

석류뿐 아니라 여러 보도 듣지도 못한 이란의 넉넉한 농수산 자원의 풍요로움을 한눈에 느낄 수 있게 해 주어 눈과 입이 함께 즐거웠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특히 내게 다가왔던 당시 이란의 풍족함은 석유가 싸서 비행기 왕복 값이 그 넓은 이란 국내 어디를 가도 100$이 넘지 않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내가 한국인으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대접은 마침 내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우리나라 TV 드라마 <대장금>이 이란에서 방영된 지 얼마 안 된 뒤라, 한국 여성의 미모와 매력에 빠져있던 이란인들이었다. 한국 여인이라서 '이쁘고 매력 있다'며 예상외의 친절함으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은 이란 문화, 특히 히잡을 조금이라도 훌려쓰면 비록 외국인이 히잡을 잘 못썼다 해도 잡아가고, 또한 술은 외부에 나와서는한 방울도 입에 대서는 안 되는 엄격한 법과 규제에 묶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란의 문화인들 가정에 초대되어가면 맥주와 위스키는 당연히 대접받으며, 흥이 오르면 서양의 사교댄스도 빠지지 않는 대담함을 경험한다는 생활문화의 이중성이었다. 역시 한 사회의 법과 규제로 다스려지는 억압은 겉으로만 지켜질 뿐, 인간이 갈망하는 자유는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표출될 수밖에 없음을 경험하고 왔다.

그러나 내게 인상 깊게 남아있는 것은 이란의 교육문화였다. 회의나 연극 관람이 없는 여유 있는 시간을 틈타 근교에 있는 유명한 선조의 무덤을 둘러싼 문화유적지를 가보면 어김없이 고사리같이 어린 유치원생들이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크고 웅장하게 꾸며놓은 선영의 무덤을 돌고 있었다. 그 선영이 지은 긴 시의 구절에 곡을 붙여 암송으로 읊으며 그 선조의 정신과 의지를 되새기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개성의 선죽교를 돌며 정몽주의 시조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를 외우며 선조들의 넋을 기리며 그 속의 서려있는 정신을 이어 새기는 옛 교육의 흔적이 그대로 살아있음을 보고 온 나의 기억은 근 20여 년의 미국과의 외교단절을 버티며 여전히 서슬 퍼런 이란인들 속에 살아있는 페르시아 문화의 자존심을 보는 듯했다.

이란 문화의 양면성은 페르시아 언어의 유려함과 세련된 발음에서 울리는 부드러움이 여느 아랍문화권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또한 그들의 대담하고 스케일 넘치는 도시 외형의 대담함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 공예 작품이었다. 작다고 하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작고 세련된 도자기나 유리로 만든 도예 작품을 전시해놓은 특별한 박물관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없었다. 이 작은 도예 박물관은 이란이 한동안 서양의 자유를 허용하던 소라 야 공주가 대접받으며 자유주의 미국의 정신을 이란의 사회에 자유시대를 허용하던 때 지어진 박물과 이라 한다.

이를 계기로 이란의 근대사를 좀 더 알아야겠다던 당시의 결심은 아직도 까맣게 묻어두고. 있지만 나는 이란의 국민의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오늘날 이란을 뒤틀린 국제 사회 속에서 버티는 <국민정신>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서방, 특히 미국과 대치하며 겪는 여러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자긍심과 자부심을 지키며 페르시아의 유려한 문화를 지키며 오늘을 살고 있는 이란 정부와 국민이다. 그들의 정신의 뿌리가 선조의 위대함을 잃지 않고 기리는 역사 교육과 일관성을 지키는 노력이 점철돼 있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벌써 20여 년이 지난 나의 기억과 인상으로 남아있는 이란의 문화와 삶의 여건이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짐작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의 페르시아 언어와 문화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스케일과 아름다운 문화가 국제사회의 어려운 위치에서도 여전히 아름답고 순수함을 잃지 않고 인간성이 뒤틀리지 않고 버텨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바람이 내 우매함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