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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39)폭풍(暴風)
[문상금의 시방목지](39)폭풍(暴風)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9.2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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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돌릴 틈도 없이, 폭발적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폭풍의 바다 한가운데, 한 척의 쪽배, 기우뚱 기우뚱, 잠길락 말락, 폭풍을 타고 물결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쪽배 한 척, 강한 영혼의 중심(中心)’

폭풍(暴風) 속에서
 

문 상 금
 

나는 너에게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영혼은 잃지 않았다

비록 주춤할 때도 있었고
피투성이 될 때도 있었지만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전부를 가졌다

아무리 강하게 몰아닥쳐도
나는 똑바로 서 있으련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걸어가야 할 길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거의 일주일 내내 바람 불고 비가 내렸다, 나에겐 늘 휘몰아치는 비와 바람의 소풍 같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태풍이나 혹은 폭풍이라 불렀다. 미친 듯이 넓은 유리창을 때리는 그 몸짓들의 난무(亂舞)를 바라보았다, 거친 것 같지만 아주 공허한 그것들은 이리저리 날아오르다 몸집을 키우고 소나무나 삼나무, 은행나무, 먼나무를 때리고 부딪혀 점점 가라앉았다.

공허함이 가라앉아 내린다는 것, 그것은 가벼워지는 것과 같다, 버린다는 것과 같다, 악착같이 지니고 있던 것을 미련 없이 툭 털어버리는 것이다, 그것들은 바로 생채기나 흔적을 남겼다.

솔잎과 솔방울이 우수수 떨어져있었고 삼나무 가지가 뚝 부러졌고 채 익지 못한 은행알들이 채 여물지 못한 고환처럼 축 늘어져 뒹굴었다, 특히 먼나무는 아, 가슴 아파라, 수만의 잎을 스스로 떨어뜨렸다.

폭풍의 언덕이라 불렀다, 제주대학교 인문대 국어국문학과가 있었던 회색 건물은 높은 언덕에 외로운 성(城)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학창시절 그 언덕을 걸어 오르노라면,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소설인 ‘폭풍의 언덕’이 떠올랐다, 영국의 한 시골 마을, 거친 바람이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어 폭풍의 언덕이라 불리는 대저택으로 마치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곤 하였다.

어디선가 히드클리프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무나 외로우면서 낯설고 폭발적인 황무지의 나부끼는 풀 갈기 같은 얼굴이 보였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폭풍같이 이 세상을 다 쓸어가 버릴 것 같은 격정적인 몸짓 너머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와 뒤틀린 욕망, 복수, 어긋난 감정, 파멸이 울룩불룩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종내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에야 결국 유일한 내 사랑이 너였었다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먼 길을 돌고 돌아왔을 때, 결국 너인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그 회한과 후회가 온통 담겨있는, 비바람에 헝클어지고 젖은 머리칼의 그 붉은 얼굴을, 그 흘러내리는 눈물을.

왜 그걸 조금 일찍 깨달을 수는 없었을까, 왜 영혼을 망가진 채로 내버려두었던 것일까.

폭풍이든, 폭풍 같은 사랑이든 일이든, 때로 눈과 귀와 혀를 온통 빼앗길 수는 있지만,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벙어리가 되고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부디 영혼을 빼앗기고 잃지는 말아야!

‘바람아 불어라, 비야 내려라, 나는 폭풍(暴風) 속으로 걸어간다, 기꺼이, 즐겁게, 걸어 들어간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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