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10월 16일 국토교통부 국정감사장에서 ‘테스 형!’ 노래가 흘러나왔다. ‘테스형! 전세가 왜 이래’란다. 홍남기 부총리가 전세 난민이 된 ‘웃픈’ 현실이다.

BC 399년에 소크라테스는 ‘구름’은 사실이 아니라고 변론했다. 젊은이를 타락시키지도 않았고, 돈을 받고 가르치는 소피스트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아테네 법정에선 ‘구름’의 조롱이 되살아났다.

한편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절은 세 치의 혀로 상대방의 주장을 격파하는 변론술이 유행했다. 출세욕에 불탄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변론술을 배웠다. 이런 변론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소피스트였다. 이들은 수사학·웅변술을 가르치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철학이 상품화된 셈이다.

대표적인 소피스트는 프로타고라스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그는 인간의 주관성을 설파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와 해적의 차이는 무엇인가? 알렉산드리아는 수많은 배와 군사를 싣고 다니니 대왕이고, 해적은 배 한 척 혹은 소규모로 다니니 도둑이라는 논리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BC 420년에 아테네 항구 피레우스의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화한 ‘정의’에 대해 서술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에겐 잘 되게 해주고, 적에게는 잘못되게 해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즉 ‘내 편엔 너그럽고 네 편엔 가혹한 것’이 정의란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권력자의 이익을 위해 정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글라우콘은 ‘불의한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보다 더 잘 산다’고 말한다.

요즘 헷갈리는 ‘정의의 개념’을 2440년 전 아테네에서 보는 듯하다.

덧붙이면 조국이 조광조로, 추미애 장관의 아들 서일병이 안중근, 북한의 김정은이 계몽 군주로 비유되고 있어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역사의 재해석인가? 언어의 곡예인가?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자문자답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당신에 대한 험담은 어디서 생겨난 것이요? 당신이 별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을 그토록 비방했겠소?”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의 신을 증인으로 삼아 증명하겠노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카이레폰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내 동지였는데, 여러분과 함께 추방당했다가 돌아온 민주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그는 BC 430년대에 델포이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사제는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러자 소크라테스는 “신께서는 대체 무슨 뜻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라고 의심했다.

한참 후에 그는 현자를 찾아가서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증명해 신탁에 반박하기로 했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정치가를 찾아갔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는 현자로 자부했지만, 전혀 현자가 아니었다. 위선자였다.

소크라테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지혜롭구나. 그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플라톤이 지은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나는 델포이의 명문(銘文)이 지시하듯 나 자신을 알려고 했지만 아직도 모르고 있다네”라고 말한다.

아폴론을 모시는 델포이 신전 입구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흔히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 명언(名言)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델포이 신전의 경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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