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사업의 가능성에 대한 소고

윤영선((사)경제문화공동체 더함 이사장)

아련한 추억. “○○아 저녁밥 차려놓았다. 밥 먹어라”, “동네사람들, ○○네 집에서 잔치를 하니 함께 밥 먹읍시다.” 흔히 공동체의 단상은 어릴 적 따뜻한 추억이다. 그래서 공동체라는 단어는 진한 향수처럼 우리 몸에 배어 아릿한 그리움으로 남아 쉬 지워지지도 않고 우리 주변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렇게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공동체, 어느 누가 공동체 사업을 부정할 수 있을까? 마을공동체 사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마을관리기업, 도시재생, 사회적경제기업 등 공동체 만들기를 목표로 내건 수많은 정책사업이 진행 중이다. 혹자들은 중세시대에 존재했던 가정공동체를 예를 들며 살림살이 경제, 자급자족 경제의 필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각종 공동체 사업에서도 과거 사례를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

그렇다면 공동체 사업이 이러한 자급자족, 살림살이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공동체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공동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하고 연관되어 있었다. 즉, 먹고 사는 문제야말로 공동체의 존재 이유였다. 중세까지의 가장 보편적인 공동체 유형은 바로 가정공동체다. 가정공동체는 경영체와 근대의 가족제도가 결합된 형태다. 경영체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가정공동체는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물질적 수단과 인적 결합으로 구성된다. 먼저 물질적 수단은 곧 토지를 의미한다. 당시에 생산수단은 토지였다. 그래서 가정공동체는 배후에 토지를 소유한 가부장을 중심으로 대장쟁이, 장인 등 다양한 계층들이 생산수단인 토지를 매개로 공동으로 살아갔다. 이렇게 물적?인적 요소로 형성된 가정공동체는 당연히 살림살이, 자급자족 공동체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사회로의 전환기, 특히 기계제 대공업 사회에서 가정공동체는 소위 기업 단위로 불리는 경영체와 사생활 영역인 근대의 가족제도로 분리 및 해체된다. 이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사회로 나아가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에서 가족들과 삶을 영위한다. 중세시대에 생산수단이 공동체 내부에 있었던 반면, 근대사회에서 생산수단은 사생활 영역 밖에 위치한다. 흔히 배후도시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주거가 생산수단이 집중된 산업단지 배후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경영체가 위치한 산업단지 그리고 사생활 공간인 주거 공간이 하나의 도시를 형성한다.

생산수단이 없는 사생활 영역에서 자급 또는 독립 가능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가족 단위가 모인 사생활 공간은 주거 또는 소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협이나 생활 밀착형 소단위 사업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동력이 된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이 공동체 내부에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 사업은 주민 밀착형 소단위 사업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단위 사업은 주민을 상대로 이윤을 창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이윤 추구 사업은 공동체를 해체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사회 서비스다. 오히려 사회 서비스는 공동체성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것도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돈을 받는 형태로 서비스가 제공 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말했듯이 돈과 공동체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비스 비용은 정부가 지출해야 한다. 즉 공동체 조직들은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 주민들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서비스 제공의 의무자는 정부이므로 정부가 예산을 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제 공동체 사업의 패러다임은 변해야 한다. 정부는 공동체 조직에게 자립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역에 필요한 사회 서비스를 공급하는 주체로 인정하고 그에 수반된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주민들의 삶의 질은 향상되고, 공동체 조직의 구성원들은 일자리를 얻게 되며, 지역은 자연스럽게 공동체성이 강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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