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승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

올해 초 전임 국정원장 원세훈을 비롯한 국정원 전임 주요 간부들에게 재임기간 중 저지른 각종 범죄에 대한 형사 판결이 선고됐다. 원세훈 등에게 인정된 수많은 혐의 중 하나는 바로 일련의 노조파괴 공작에 관한 것이었다. 민주노총·전교조 등은 2018년 6월께 이명박 정부 시기 자행된 일련의 노조파괴 공작에 대해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바, 최근 문서송부 촉탁을 통해 원세훈 등에 관한 형사재판 기록을 입수할 수 있었다.

재판기록을 검토하며 몇 번이나 눈을 의심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국정원은 검찰에 내부 감사 자료를 보내 세간에서 의혹이 제기된 일련의 노조파괴 공작의 내용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자인했다.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정원은 이명박 정부 시기 KT노조·서울지하철노조 등 21개 노동조합에 대해 민주노총 탈퇴를 유도했다. 구체적으로 노사 대표자와 접촉한 뒤 85억원의 추징금 납부시한을 연장해 줄 것을 조건으로 민주노총 탈퇴를 종용하기도 했으며, 공공기관에 설립된 노동조합의 경우 주무부처를 압박해 민주노총을 탈퇴하지 않을 경우 1인당 30만원에 해당하는 장려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겁박했다. 심지어 국정원은 고용노동부와 협업해 민주노총 탈퇴를 원조할 목적으로 위법한 행정해석을 제시하게 했다. 특히 서울지하철노조는 위와 같은 행정해석에 근거해 민주노총을 탈퇴했는 바, 법원은 서울지하철노조의 탈퇴결의가 무효라고 판단했다. 나아가 온건후보 당선을 원조하기 위해 KT노조 위원장선거 과정에 개입했으며, 위원장선거가 끝난 이후에는 민주노총 탈퇴를 위한 시나리오를 획책해 이를 바탕으로 탈퇴를 유도한 사실이 확인됐다.

둘째, 국정원은 특히 전교조에 대해 적대적인 운영기조를 유지했다. 국정원은 전교조·민주노총·전국공무원노조를 3대 종북좌파 세력으로 규정한 뒤, 그중에서도 전교조를 핵심 척결 대상으로 삼았다.

국정원은 심리전단을 이용해 8개 이상의 보수단체와 접촉하게 한 뒤 이들로 하여금 전교조 규탄시위·피케팅·토론회 등을 진행할 것을 지원했다. 국정원은 보수성향 시민단체의 전교조 규탄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최소 1억9천700만원의 예산을 유용했다.

특히 가장 주목할 점은 이른바 “탈퇴서한” 공작이었다. 한 보수단체는 2011년 5월 전교조 소속 6만 조합원에게 탈퇴 권유 서한을 발송했는데, 이와 같은 탈퇴서한 공작 역시 국정원 심리전단과 해당 보수단체가 사전에 계획한 내용이었다. 국정원은 서한 발송비용과 기타 언론광고 비용 3천만원을 지원했다. 탈퇴서한 공작 이후 온라인에서는 기괴한 동영상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전교조 탈퇴 조합원의 양심공백 영상이었는데, 여기서 심리전단의 전교조 파괴 공작의 정수(精髓)가 나온다. 해당 영상은 국정원 심리전단이 특정인을 전교조 탈퇴 교사로 위장해 촬영한 거짓 영상이었다.

또한 국정원이 청와대에 제출한 대외비 문건에는 이른바 법외노조 통보 처분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원세훈은 각종 회의에서 국정원 간부들에게 전교조를 “불법단체화”하라고 수시로 지시했는데, 해당 대외비 문건에는 전교조 소속 교사들에게 신속한 징계를 단행해 해직자를 양산해 법외노조 통보 처분의 근거를 마련하고, 법외노조 통보 처분 이후에도 전교조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 전략을 획책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셋째, 국정원은 전국통합공무원노조의 출범 및 민주노총 가입 결의 과정을 방해했다. 통합공무원노조는 3개 노조(옛 전국공무원노조·전국민주공무원노조·법원공무원노조)가 2009년 9월 통합해 출범한 노동조합이다. 국정원은 소속 정보담당관을 동원해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인사들을 접촉해 조합원들의 총투표 불참과 반대 투표를 유도했다. 보수단체를 동원해 민주노총 가입 규탄 집회를 유도하고 항의 이메일을 발송하게 하는 등 여론전을 시행했다. 심지어 통합공무원노조의 전임 위원장인 양성윤 위원장에 대한 징계 과정에도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위와 같은 일련의 노조파괴 공작의 내용은 담당 변호사가 추론한 내용이 아니다. 감사 결과를 통해 국정원이 스스로 밝힌 노조파괴 공작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노조파괴 공작의 구체적인 내용을 증빙하는 각종 문서, 예산지출 내역을 확인하며 참담한 심경이다.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다. 왜곡된 세계관을 가진 국정원 간부들에게 우리는 노조 조합원이 아닌 척결 대상에 불과했다.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전국단위 노동조합 단체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한 뒤 철저한 와해공작을 획책한 사실은 민주사회에서, 아니 문명사회에서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정원이 자행한 일련의 노조파괴 공작으로 민주노총·전교조·공무원노조 등의 단결권은 그야말로 유린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노조활동을 하면 무려 반국가 세력이 되는 세상. 불과 10년 전까지 우리들이 살고 있던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요즘 유행하는 한마디 질문으로 이 칼럼을 마치려고 한다. 이게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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