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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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은 1980년대까지 회장단 신년 기자회견의 전통이 있었다. 새해 벽두에 굴지의 대기업 회장들이 출입기자들과 만나 새해의 전망과 기업의 과제들에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히는 자리였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경제부 데스크들의 어깨가 무척 가벼웠다고 한다. 톱뉴스 거리를 고민하거나 찾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비중있고 보는 이가 많았던 행사였다. 

그런데 1982년 이 자리에서 정주영 회장과 구자경 회장이 정면으로 충돌한 적이 있었다. 원인은 현대의 전자산업 진출, 정주영 회장이 기자회견장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구자경 회장은 아예 얼굴을 정회장의 반대편으로 돌리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눈치빠른 기자들이 구 회장을 파고 들었다. “현대가 전자산업에 진출한다니 겁이 나는 것은 아닌가요?” 구회장의 자존심을 건드린 질문이었다. “누가 겁을 내요. 전자산업은 아무나 합니까.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노가다에서 번 것, 다 까먹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기자들 앞의 공개석상이지만 있는대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정 회장은 “나는 전자공업을 해도 TV나 라디오는 안 만들어요. 전부 해외에 파니까 구회장에게는 피해가 없을 거예요.” 서로가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배석했던 전경련 임원들은 급한 성질의 두 회장이 멱살이라도 잡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회장들은 그만큼 격의 없고 솔직했다.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체계적인 언론 대응법을 익히거나 미디어 트레이닝 같은 걸 받은 적도 없었지만 진실이야 말로 최고의 소통수단이라는 것을 체득하고 있었다. 파문은 있었지만 언론과의 대화를 피한 적은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전자산업도 크게 발전했다. 

1995년 2월, 전경련 회장에 연임된 최종현 회장은 관례대로 기자들과 만났다. 당시 문민정부의 대기업 정책이었던 업종전문화와 소유분산정책이 자연스레 화두에 올랐다. 최 회장은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에 맞지 않는 정책이라며 평소의 지론을 얘기했고 기자들도 항상 듣던 얘기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날 처음 출입한 기자가 일을 냈다. “최회장, 정부 정책에 정면 반발”, 1면 톱에 자리잡았다. 전혀 예상 밖의 편집이었고 방송이 뒤따라 이를 부추겼다. 사태가 심각해졌다. 해명 차 찾아간 선경의 간부에게 청와대 관계자는 선경그룹 채무상황을 요약한 자료를 보여 줬다고 한다. 제2의 국제그룹사태도 일어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며칠 간의 불 같은 대치가 이어졌지만 결국 최 회장이 경제부총리를 찾아가 직접 해명을 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에 전경련 회장으로 선임된 김우중 대우 회장은 이듬해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비슷한 고초를 겪었다. 그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대우에 대한 과징금 100억 원에 대해 소송을 해서라도 바로 잡겠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 과징금 낼 돈도 없다고 했다.

다음 날 도하 각 신문 제목은 '전경련, 정부에 정면 반발', 몇 년 전 기사의 데자뷔였다. 그러나 당시 전경련과 청와대의 대화라인은 잘 작동돼고 있었다. 김 회장 발언의 전문을 전경련에서 받아 읽어 본 청와대 측은 문제삼지 않겠다는 반응을 전해와 사태는 일단락됐다. 평소에 구축된 재계와 정부의 핫라인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해 자칫 얼어붙을 뻔 했던 정⋅재계 관계가 오히려 단단해 진 계기가 됐다. 

2007년 전경련 회장이던 조석래 효성 회장은 제주포럼 기조강연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차기 대통령은 경제를 제일로 하는 사람이 돼야한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지금 놓고 보면 노동운동 하는 사람이 “노동을 잘 아는 사람”, 군인이 “안보를 잘 아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호한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범답안이었다. 거기다 클린턴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Stupid, it’s economy) 라는 선거 캠페인까지 널리 알려진 때였다. 그런데 이 말이 경제가 아니라 이명박 후보로 인식됐다. 언론이 그렇게 몰고 갔다. 대대적 보도가 이어졌고 조 회장의 해명은 묻혀버렸다. 그러나 1주일 후 청와대의 한 행사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조회장에게 발언 할 기회를 주며 예정 된 일정을 훈훈하게 소화했다. 변양균 당시 정책실장이 조회장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대통령의 반응이 나온 이상 갈등관계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재계의 총리로 불리는 전경련 회장이라는 자리는 재계를 대표해 국민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개별 기업의 입장만을 알릴 수도 없었고 공개 된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오해를 사기도 했고 어려움을 숱하게 겪곤 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훼손하는 어떠한 제도나 장치를 도입하자고 주장한 적은 없다. 오히려 언론의 자율성을 신장시키고 대화를 통해 나라 발전의 동반자로 같이 가자고 했다. '한국광고주협회'를 출범시키고 현대의 '신영언론기금', '삼성언론재단', '대우언론재단', 'SK, 기자협회 펠로우십', 'LG연암언론재단', 쌍용의 '성곡언론문화재단' 등을 기업이 설립한 것도 그런 취지였다.

기자회견, 대담, 인터뷰, 기고, 연수, 출장 등 전경련 회장의 언론을 통한 대국민 소통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갈등과 대립이 아닌 협력과 포용의 언론관계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우리 경제도 커지고 기업도 세계로 뻗어나갔다. 전경련 회장의 대 언론 활동이 사라진 요즈음, 어려운 한국경제의 오늘을 보는 듯 해서 아쉽기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