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타도 황순원, 극복 김춘수

김광수




모처럼 잠언으로 출발한다. 가로되 역사는 산 자가 죽은 자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유물이나 유적까지로 인정 가능하지만 역사는 아니다. 듣지 않고 말하기와 말하지 않고 듣기가 완성된 말이 아니고, 읽지 않고 쓰기와 쓰지 않고 읽기가 온전한 글이 아니고, 기록되지 않은 인생이 역사적 인생커녕 일기장 인생조차 아니듯이.


기록된 역사와 인생도 크게 둘로 나누어지니 이분법이다. 기록이 사실에 입각하여 써졌거나 써지면 사기(史記)와 정사(正史)가 되고, 상상력의 도움을 받았거나 받으면 유사(遺事)와 야사(野史)가 된다. 사기와 정사가 역사 자체라면 유사와 야사는 문학적이고 비유다. 역사와 문학이 만나 유기적 결합을 한 것이기에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의 화두, ‘타도 황순원(黃順元), 극복 김춘수(金春洙)’는 유사고 야사고 문학적이고 비유다. 격을 낮추면 패관의 패설일 수도 있다.


신라 때 일이다. 지방관리가 백성의 소리를 듣는답시고 상민으로 변복한 하급벼슬아치로 하여금 시정배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모아, 글로 써서 올리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를 씹는 재미는 가진 것 없는 이의 특권이고 사는 맛이다. 토설요법에 의한 심신 정화작용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뿔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사람이 누구던가? 어릴 적부터 칭찬에서 칭찬으로, 칭찬을 자양분 삼아 자란 자 아니던가. 자신을 능멸하는 소리로 가득한 보고서를 믿을 수도 믿을 리도 없었다. 무장한 병사를 집단으로 보내서 확인하기, 당연지사였다. 백 가지 성씨를 골고루 나누어 하나만 가지는 백성이자 없는 이는 또 누구인가? 거짓말과 거짓말의 돌연변이 변명 외에는 방어기재가 전무한 이 아닌가. 절대로 욕한 적도 비방한 적도 없다고 잡아떼니, 죽어나는 것은 여론을 정직하게 수집해서 올린 패관뿐 아니겠는가.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진 패관의 다음 짓거리는 불문가지, 발품 다리품 팔 필요 없이 주막에 눌러앉아 유유히 먹고 마시고 주모와 노닥거려가면서 보고서랍시고, 우리 원님 잘하고 또 잘한다며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찜 쪄 먹을 예찬시가관비어천가 官飛御天歌를 써서 바치면 만사형통, 칭찬도 듣고 상금까지 받았을 것이다. 하급벼슬아치가 패관이었고, 그들이 꾸며낸 구밀복검이 패관패설이었다가 국문학사에서는 신라대 패관문학으로 승격, 고려대 의인가전체 거쳐 조선대에서 최초의 고대한문소설금오신화, 최초의 고대한글소설홍길동전을 필두로 전기체고대소설이 된다.


소설가지망생이었다가 소설가가 된 문인치고 한두 가지 뼈아픈 경험,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추억이 된 기억이 없는 분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타도 황순원책상머리나 밥상머리에 붙여두고 작품 쓸 때도 밥 먹을 때도 꼭꼭 씹으며 각오를 다지기 위한 표어라 한다. 자신의 대표단편 소나기의 주인공인 양 순수한 영혼을 지닌 소설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싶다. ‘극복 김춘수도 같은 맥락의 표어라 한다. 시인의 초기대표작 에서 보여주는 정 많은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이 순수한 영혼의 소설가와 정 많은 시인을... 소설가와 시인 지망생으로 하여금 살벌한 표어를 되뇌게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황순원과 시인 김춘수, 닮은 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 두 분에 대한 작가지망생이 이구동성으로 토해내는 닮은 점은 으스스하다. 왜냐하면 후진이나 제자의 등단에 지극히 인색했기에 그렇다.


교수 소설가 황순원의 경우다. 신춘문예를 필두로 황순원이 공모전의 본심심사위원이란 소문이 사실로 굳어지면, 해당 신문사나 공모전에 응모한 후진과 제자는 미리 포기해버린다 했다. 이름을 가리고 하는 예심에서는 몰라도 이름을 반쯤은 드러내야 하는 본심심사에서 비슷한 수준이면 후진과 제자를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문예지 추천의 경우는 두어 술 더 떠서, 상당 수준에 도달한 작품일 경우에도 첫마디부터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한다.

자네, 소설 포기하고 어학을 하든지 딴 일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나.”

교수 시인이었던 김춘수도 오십보백보로 어금버금했다 하니 후진과 제자 입장에서는 기가 차고 맥이 딱 막힐 일이었다. 소설가 시인 등 문인지망생에게 어학을 하거나 딴 일을 찾아보라니... 치명적이었고 완전 수모였다. 이를 박박 갈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계속 존경하고 추종할 수 있었을까. 단연 아니었을 것이다. 존경의 자리에는 오기가, 추종의 자리에는 반감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분의 대칭점에서 우뚝한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와 시인 서정주(徐廷柱). 일정수준이 넘은 작품이면 소설가와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믿어주시는 분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가능성 있는 후진이나 제자의 추천도 마다하지 않았다. 두 분이 등단시킨 소설가와 시인을 김동리 군단, 서정주 사단이라 부르기도 한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오늘날 황순원 기념회, 김춘수 기념회는 그리 많지 않다. 있다 해봤자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러나 김동리 기념회, 서정주 기념회는 열손가락 아니라 열 사람의 손을 합해서 꼽아도 모자랄 정도다. 기념관 역시 기념회에 정비례한다.


문단의 세가 숫자로 정해진 지 오래인 요즘, 소설가 김동리 시인 서정주 두 분의 천리안이 돋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소설가 황순원 시인 김춘수 두 분이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필자가 시대착오적 문인이라서 그런가. 벅수라서 그런가?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05 13:10 수정 2020.04.0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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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