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강의 인문으로 바라보는 세상] 눈 내리는 날의 행복



온난화로 인해서일까요, 최근에는 눈 내리는 날이 부쩍 줄어들었습니다. 눈길을 걸을 기회도 없고, 함박눈을 펑펑 맞던 일은 오래전 기억에만 남아있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제법 눈이 내리니, 생각은 타임머신을 타고 기억을 거슬러 오릅니다.

 

작년 봄쯤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평창을 지날 일이 있었습니다. 오래전 영동 고속도로를 자주 오갔던 일이 있었지만, 정작 올림픽이 열렸던 평창에 들린 적은 없어서인지, 이곳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낯설기만 했습니다. 지역 주민에게 물어보면서 어느 국도를 따라가니 작은 마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안흥찐빵으로 알려진 바로 횡성군의 안흥입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50, 60년대 공동체의 삶이 느껴지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다리를 건너면 공공기관으로는 주민자치센터와 우체국이 하나 있고, 조그만 농협에, 중국집도 보입니다. 또 오래된 간판을 이고 있는 칼국수 집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옛 서부극 <OK 목장의 결투>에 보이듯 아기자기한 마을입니다.

 

특별한 것은 이 작은 마을이 찐빵 하나로 전국에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소문에 이끌려 그곳에 가서 찐빵을 먹고 또 사가기도 했습니다. 예전 생각이 나서 그 빵집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마을 중간쯤 위치한 오래된 가게를 찾았습니다. 예전의 그 가게가 분명한데, 건물 안의 구조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주인 되는 아주머니, 아니 이젠 머리 희끗한 할머니가 되셨을 텐데... 그 할머니는 보이질 않으니, 순간 무언가 달려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원래 주인이었던 그 할머니는 다리 건너서, 마을을 빠져나올 즈음에 위치한 국도 변의 조그만 가게에 빵집을 새로 차렸습니다.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따뜻한 작은 마을 공동체도 결국 이란 괴물 앞에서 맥을 못 추고, 금이 가고 파열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졌습니다. 저는 따뜻한 찐빵을 하나 뜯어 먹으며, 옛날의 추억을 되새겼습니다. 잠시나마 그 기억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며, 다음엔 눈 내리는 겨울에 다시 와서 김이 서린 차창 밖에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을 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먹겠노라고 다짐을 하며 가게를 나섰습니다.

 

이렇게 먹는 것만 생각해도 마음이 따스해지는데, 오래 전 미국 개척기를 생각하면 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안쓰러우며, 또한 동시에 강인한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미국을 건국한 시점이, 개척민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시점을 기원으로 한다면, 대략 400년이 될 것입니다. 미국사(美國史)에 따르면 미개척 초기 이민자의 절반 이상이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일 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다시 한해가 가고 또 겨울이 오면, 그만큼의 인원이 반감되는 것이지요. 그들의 당면과제는 아마도 눈 오는 날의 생존이었을 겁니다. 지상의 모든 먹을 것을 뒤덮고 궁극의 고난으로 다가왔던 눈이 어느덧 문명세계에선 낭만으로 다가오니, 오늘날 첫눈 오는 날의 약속, 추억, 낭만이 되어 현대인은 함박눈이 내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눈이 푹푹 오는 날 눈의 세계로 푹 빠져들고 싶은 생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습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설국에서 눈 가득한 세계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고, 프로스트는 숲은 그윽하며 어둡고 깊지만이란 시 구절로 우리를 깊은 심연으로 이끕니다.

 

한국 시인 중에 눈() 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습니다.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는 우리를 깊은 설국(雪國)으로 떠나게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백석 뿐 아니라 김춘수 시인의 시도 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호반의 도시 춘천에는 명동으로 가는 길목의 한 건물 2층에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란 카페가 있었습니다. 눈 오는 날 왠지 샤갈의 마을에 들리고 싶었던 마음이 단지 상혼()에 미혹되어서인지, 아니면 본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낭만적 감성이 깨어나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카페를 마주한 횡단보도에 서서 파란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카페(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어서 오세요, 이곳으로 오세요하며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샤갈의 마을에는 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발갛게 타오르는 장작불이 낭만적일 뿐만 아니라 식욕을 자극합니다. 몇 년 전 가장 인기 있는 겨울 간식거리가 군고구마라는 뉴스 보도가 있었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노랗게 익은 군고구마를 까먹는다든가,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마른 솔가지를 딱딱 부러뜨려 아궁이에 넣을 때 나오던 매캐한 연기와 짙은 솔 내음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시뻘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언 손을 온기에 녹이던 일이 잊히질 않습니다. 이런 추억을 되새기며 훈훈한 장면을 그려보니, 살아있는 한 행복은 결코 먼 곳에 있지 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눈 오는 날, 프로스트의 시를 떠올리며 잠시 행복한 시간을 가져봅니다.

 

 

산들 바람에 실려 눈 내리는 소리뿐.

숲은 그윽하며 어둡고 깊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그리고 가야할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부분

 

 

 

눈 내리는 날,

기다림이 있는 당신은

그리움이 있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17 10:43 수정 2020.02.1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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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