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20.02.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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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차탁을 앞에 두고 몇몇이 둘러앉았다. 오늘은 보이차다. 작은 백자 잔은 삿갓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에 굽은 햇무리를 닮아있다. 굽과 찻잔 중간쯤 노목의 연분홍 매화가 활짝 피어있다. 새 한 마리가 매화꽃에 날아 앉을 것 같다. 입안에 차 한 모금을 넣어 혀의 가장자리를 세워 경구개로 올려보낸다. 스읍스읍, 혀를 굴려 차의 길을 내자 혀가 지나는 길에 향기가 모인다. 낯설지 않는 익숙한 맛, 노을빛 가득담은 세월의 맛이다. 연분홍 매화가 세월의 깊이에 물 들 것 같다

창가 앞, 고개를 쑥 내밀고 있는 난의 향기가 활짝 열렸다. 들어서면, 분 향기가 바짝 코를 자극한다. 이곳 주인의 향기는 없고 난의 향기만 가득하다. 6년 전, 그녀가 난 분을 보내왔다. 내가 난을 좋아하는 건 꽃도 꽃이지만 잎이 좋아서이다. 곧게 뻗은 잎은 무언의 충고처럼 나를 돌아보게 해서 좋다.

그런데 이 난은 첫해 꽃을 피우고는 더는 꽃을 피우지 못했다. 마음이 가야 만나듯, 꽃을 피우지 못한 난은 내 눈 밖에 벗어나 마당 한 귀퉁이에서 지내게 되었다. 더구나 곧고 매끄럽게 뻗은 난 잎과는 다르게 작달막하고 산만했다.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네 해를 그렇게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사람은 가끔 착각하고 살 때가 있다. 소중한 것은 옆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중할수록 멀리 두는 지혜를 잊고 산다. 시야에서 벗어난 난은 햇살과 바람으로 뿌리를 굳히고 있었지만, 잎은 타들어 가고 군데군데 충해벌레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짠하여 사무실에 들여놓자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음이 갈대가 되어 꽃에 빠지고 말았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우리는 차와 함께한다. 아기 눈빛처럼 맑은 봄날에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하동지방의 우전을 마시고, 싱그런 햇살이 빛나는 여름에는 풍미 있는 제주의 세작을 마신다. 으스스한 기운이 몰려오는 추운 날에는 세월의 깊이를 품고 있는 보이차를 마신다. 차(茶)공부를 가르치는 그녀는 잡 향이 섞이지 않는 푸른빛 맛 보이차 `청차'(청병)을 선호하고, 그녀의 수업을 들었던 우리는 달고 매끄러우며 그윽한 향기가 나는 보이차 `숙차'(숙병)을 좋아한다.

그날의 차를 결정하는 것은 거수로 한다. 대부분 그녀가 양보한다. 오늘의 다식은 제철 뿌리식물인 콜라비다. 무의 매운맛을 없애고 양배추의 단맛이 강하다. 아삭하니 씹히는 것이 재미처럼 기분 좋다. 단맛이 강해 차의 맛을 방해하지만, 오늘은 차에 기대지 않고 만남을 즐기기로 한다.

모임을 한 지 열 해에 가깝다. k는 낭만적이며 분위기를 잘 이끈다. 가끔 불같은 성격을 제어 못해 점수를 깎이기도 한다. 그런 k를 점잖게 앉아있게 만드는 j는 시어머니를 서른 해 모시며 가정의 질서를 지키는 베테랑 주부다. 서로의 장점이 빛나기도 낮아지기도 한다. 먼 우주의 행성이 만나 빛을 내듯, 우리는 우리만의 빛을 내고 있다. 마음의 모양대로 뿌리를 내리고 뿌리는 서로를 연결하고 지탱하는 작은 우주가 된다.

사무실의 일곱 개 난 분은 제철이 오면 꽃을 피운다. 향기로 자신을 알리기도 하고 오늘처럼 차향을 덮기도 한다. 우리는 향기를 길들인다. 투박한 장인의 향기로 만들기도 하며, 연분홍 매화 위를 나는 새가 되기도 한다. 해가 거듭할수록 단단해지는 뿌리처럼, 맛이 없는 데서 맛을 찾는 것처럼, 입안에 개운한 단침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향기보다 더 향기로운 사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곁이 있기 때문이다. 곁은 행복의 가장 첫 번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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