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이평진 기자]


유통업체와 20년 장기계약 
사과 처분 독점권 권한 가져 
다른 경로로 판매 불가
‘불리한 계약서’ 조항에
가격협상도 쉽지 않아 허탈

 

충북 보은지역 엔비사과 재배농민들의 수매가격 불만은 한두 명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 상당수의 농민들이 더 이상 엔비사과를 추가 식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심한 경우는 사과나무 자체를 베어내고 다른 품종을 심겠다는 농민들도 있다. 어떤 농민들은 엔비사과 유통업체인 에이치앤비아시아(H&B아시아)와 거래를 끊겠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 회사와 장기계약을 한 상태여서 실질적으로 거래를 끊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보은군의 한 농민은 “그 회사하고 계약을 했기 때문에 수매가가 맘에 들지 않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계약서를 다시 읽어보니 20년 계약으로 돼 있어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농민 한 명도 “계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변호사 자문도 구해봤다. 그러나 엔비라는 품종에 대한 권리가 그쪽 회사에 있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농민들이 회사 측과 맺은 계약서를 보면 계약기간은 체결일로부터 21년간 지속된다고 명시돼 있다. 보은군의 경우 2018년부터 계약을 했기 때문에 2039년까지 효력이 발생하는 셈이다. 계약만료 이전에는 엔비사과를 다른 상표나 경로로 판매하는 게 어렵도록 돼 있다.

보은군의 한 농민은 “수매가격 불만이 있어도 일방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 회사에 전량 납품을 해야 한다. 수확한 과일은 한 개도 내 맘대로 처분을 못한다. 계약이 그렇게 돼 있다. 엔비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무를 베어내는 수밖에 없고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 엔비사과 재배가 시작된 충남 예산군의 농민들도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한 농민은 “엔비사과는 클럽품종이라고 한다. 우리도 처음에 20년 계약을 했다.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농민들이 서로 엔비를 심겠다고 했다. 묘목이 부족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수매가격에 불만이 있으면 나무를 베 내는 수밖에 없다. 예산에서 한 농가가 뽑아냈다”고 말했다.

계약서에도 ‘재배농가는 에이치앤비아시아의 사전 서면 동의 없이 제3자에게 판매하거나 양도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또 회사가 지정하는 산지유통센터로 집하·입고하지 않을 경우 2000만원, 회사의 사전 동의 없이 판매·유통한 사실이 입증될 경우 3000만원의 위약금을 물도록 돼 있다.   

엔비사과는 뉴질랜드의 엔자(ENZA)라는 회사가 개발해 품종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갖고 있다. 품종명은 ‘사일레이트’로 등록돼 있고 이 품종의 상표가 ‘엔비사과’다. 국내서는 2011년에 품종보호출원이 돼 있어 25년간 품종보호권을 갖는다. 이 엔자 회사의 한국측 대리인이 에이치앤비아시아라는 회사다. 

이 회사가 품종보호권을 갖고 있고 수확한 사과의 처분에 대해서도 독점적 권한을 갖는다. 수확한 사과는 전량 수매에 응해야 하고 농가 자의적 처분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설령 수매가격에 불만이 있더라도 다른 경로로 처분할 수 없다. 결국 농가 입장에서는 가격협상을 잘해 수매가격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협상에서 회사측이 우월한 위치에 서고 농민들은 ‘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데 있다.

계약서를 보면 ‘매년 시장 환경 및 마케팅 여건 등을 고려하여 대표기관과의 협의를 통하여 과일 품질등급 기준과 수매가격을 결정하기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대표기관이란 엔비사과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대표 조직, 즉 보은군의 경우 사과협의회를 말한다.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농가 대표조직과 회사측이 협의를 통해 가격결정을 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향후에도 회사 측이 ‘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통은 오로지 회사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농민들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보은군 한 농민은 “계약서 곳곳에 농민이 불리한 대목이 한 둘이 아니다. 그쪽에서 가격협상을 안하겠다고 버티면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보은=이평진 기자 leepj@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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