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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대‘한심(寒心)’국] 35편: 장마

조인 작가 승인 2020.09.27 22:23 의견 0

장마철 비로 연일, 매시간, 매분 충분히 적셔져 걸음마다 끈질기게 물어뜯는 진흙 길처럼 코로나 생활도 한없이 늘어진다. 조금만 움직여도 활짝 열리는 땀샘 안에는 가득히 물이 고이고, 멈추지 않는 비처럼 계속 흐른다.

‘오늘은 어떤 향수를 뿌릴까?’

지원은 몇 개 되지 않는 향수 중 하나를 심각한 표정으로 고르고 있다. 원래 하나밖에 없을 때는 고민의 여지가 없었는데, 하나 더 선물을 받고 보니, 골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둘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지 말자. 경우의 수는 뿌리지 않는 것까지 최소한 세 가지가 나올 수 있다.

“여보, 가끔은 나한테 내가 맡아도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거 같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향수 좀 뿌려야 할 거 같아.”
“그래? 하기야, 나도 그럴 때가 있어. 다른 사람들은 못 느껴도 나만 느낄 수 있는, 좋지 않은 냄새. 그럴 땐 나도 향수를 좀 뿌리긴 해. 혹시 좋아하는 향수 있어?”
“아니, 향수를 써본 적이 없어서.”
“그러면, 내가 사용하는 향수 남자 버전이 있다고 하니까 한 번 써봐. 주문해 줄게.”
“응. 고마워!”

며칠 후 아내가 주문해 준 향수가 도착했다. 10미리를 별도로 덜어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용기도 따라왔다. 어린 시절에 향수 가게를 지나다가 50대 중반의 머리숱 적은 사장님이 작은 용기에 담는 장면을 종종 봤기에 지원은 향수병을 들어서 작은 용기에 분무기 물을 쏘듯 “칙 ~ 칙 ~” 몇 번 뿌린다. 

‘이거 들어가는 거보다 새는 게 더 많겠는걸?’

하지만, 무거운 병을 들고 다닐 수는 없기에 작은 용기에 가득 찰 때까지 계속 분사한다.

“칙 ~  칙~”

그렇게 번거롭게 향수를 옮겨 담았지만,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병이 예쁘다면서 구매한 향수 하나를 선물로 주니, 견물생심(見物生心)으로 덥석 받았다. 향수가 두 가지면, 하루는 이거 다른 날은 저거 하면서 순서를 정해서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선택의 폭이 생기면 경우의 수가 늘어난다. 하루는 저거 다른 날은 저거일 수도 있지만, 오늘과 다른 날 이거, 그다음 날은 저거 식으로 선택의 폭을 점점 넓혀간다. 

“감사합니다.”
“뭘, 지사님이 그렇게 열심히 하셨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무쪼록 어르신께는 감사 인사 잘 전해 주십시오.”
“네.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충성심을 보여 주시면 됩니다.”

지사는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마음에 가장 먼저, 이번 판결에 힘써 준 어르신께 인사를 올렸다. 

‘시장은 죽고, 나는 살고. 인생이 그런 거지. 누군가가 죽으면 누구는 살아야 공백이 생기지 않으니까.’

역대 가장 긴 장마가 끝났다. 언젠가 끝날 장마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끝날 때까지 안심하지 못했다. 하늘에서 쏟아진 물은 무섭지 않다. 다만, 그 물이 모여서 한 번에 몰아치면 아무리 단단한 벽도 속절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러나 그런 무서움도 구름이 걷히고 햇볕이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그리고 또, 비를 그리워한다. “그놈의 비 진저리가 난다.”라고 말한 지가 채 한 달도 못 돼 “휴~ 덥다. 소나기 한 번 퍼부으면 좋을텐 데.”라고 투정 부린다. 사람의 마음이야 어제와 오늘 다르고 촌각에도 변심하기 마련이어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지사는 오늘 충성을 다시 맹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자신의 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시장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줄 누가 알았을까? 어르신께 잘 못 보인 사람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다. 저 아래 지사도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는가? 죽지 않았다고 낫다고 할 수도 없다. 가정도 파탄 났고, 그 정치 생명도 끝났지 않았는가?’

지사는 자신이 충성하기로 맹세한 게 천운이자 견기이작(見機而作)한 자신의 처신이 마음에 들었다. 

‘정치는 내 마음대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늘의 위기가 내일의 기회이며, 절정이라고 생각한 오늘이 내일의 패망이 될 수도 있다.’

장마가 되기 전까지 무사태평하게 하늘을 쳐다 본 사람들이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 나면, 하늘을 쳐다보는 게 싫다고 하지만, 그런 시절에도 오히려 이익을 얻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위기를 벗어나 한시름 놓긴 했지만, 지사도 결코 순탄한 내일이 보장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충성 서약은 녹취됐고, 언제라도 세상에 풀려서 거대한 태풍이 돼 자신을 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사의 마음은 동틀 무렵 급할 게 없는 도로에서도 서둘러서 지나가는 차들의 성급한 소리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다! 생각이 복잡해지면, 죽는다. 그게 이 바닥 생리다.’

지원은 어렵게 선택한 향수를 뿌리고 나와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무질서하고 운영 위원들은 거수기 수준에 불과했다. 지원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마디 한다.

“지난번 회의와 관련한 내용은 하나도 피드백이 없네요? 아무리 ‘코로나 19’로 인해서 추진 내용이 없다고 하지만, 경과보고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뭐, 많은 질문이 있겠지만 그런 질문은 회의 마지막 순서에 기타 안건 시간에 해주시면 됩니다.”
“네. 그런데, 회의 순서는 없나요? 자원 절약을 위해서라면 파일을 전송해 주시던지, 아니면 칠판에 적어 주셨어도 좋았을 텐데요.”

지원의 말에 반격하려던 교감 선생은 말문이 막혀 그저 사람 좋은 할배처럼 마스크 뒤에서 쓴웃음을 짓고 만다. 빨리 속행하려던 의무적인 운영위원회는 지원 때문에 조금씩 길어진다. 50분을 계획하고 온 한 여성 운영 위원은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되자, 전화하는 척 하면서 노골적으로 지원에게 불만을 표출한다.

“50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지금에서야 끝났어!”

지원은 본인을 겨냥한 말인 줄 알면서도 모른척한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다음에는 두 시간 이상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군.’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시작 전에는 보슬비였던 게 거침없이 쏟아지는 기관총처럼 공간을 가득 메운다. 

“집에 가기 어렵겠네. 향수 뿌린 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까?”

약한 빗줄기는 감당하지만, 거센 빗줄기에는 속수무책인 우산으로 겨우 머리만 가린 채 가방과 옷가지가 모두 젖는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내리는 릴케의 밤의 고독처럼 피할 수 없다. 정말 피하고 싶다면, 감히 나서면 안 된다. 죽은 듯이 실내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게 뭐람? 조금 전만 해도 괜찮았는데.”

다들 나오면서 한 소리씩 한다. 그러나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그런 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력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면서 온 지면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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