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 / 임해리] 미국의 대형 병원 두 곳이 환자에게 불필요한 척추수술을 시행했다는 의혹으로 거액의 합의금을 물게 됐다. 수술 건수와 난도가 높을수록 의사의 보수가 늘어나는 성과급 제도가 과잉수술을 부추겼다는 지적이 나온 사건이다.
미국 워싱턴주의 의료기관 프로비던스 헬스앤드서비스(Providence Health & Services)와 멀티케어 헬스시스템(MultiCare Health System)은 신경외과 의사 제이슨 드레이어(Jason Dreyer)가 시행한 척추수술을 둘러싼 환자 집단소송 두 건을 총 1억 5550만 달러(15일 환율 기준 한화 약 2095억 원)에 합의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다. 병원별 합의금은 프로비던스 1억 달러, 멀티케어 5550만 달러다. 지난 9월 말 법원에 제출된 합의안은 최종 승인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의사 연봉 최대 290만 달러…수술 건수·난도 따라 성과급
사건은 2013년 드레이어가 프로비던스 산하 세인트메리 메디컬센터에 채용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병원은 신경외과 의사에게 수술 실적에 따라 보수를 지급하는 생산성 중심의 성과급 제도를 운영했다. 수술 횟수가 많고 복잡한 수술을 시행할수록 의사가 받는 금액도 늘어나는 구조였다.
미국 법무부에 따르면 드레이어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프로비던스가 운영하던 51개 병원에서 수술 실적이 가장 높은 신경외과 의사 중 한 명이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받은 연간 보수는 250만~290만 달러(약 33억 6800만 원~39억 1000만 원)에 달했다. 당시 환율과 관계없이 달러 금액만으로도 일반적인 의사 보수와 상당한 격차를 보이는 수준이다.
프로비던스 세인트메리 메디컬센터가 소속 신경외과 의사의 불필요한 척추수술 의혹과 관련해 환자들이 제기한 집단소송에서 1억 달러의 합의금을 물게 됐다. 병원 측은 의료진의 환자 안전 문제 제기에도 해당 의사의 수술을 지속하도록 방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AI 생성이미지]의료진 경고에도 수술 계속…문제 의사 다른 병원서 재채용
문제는 높은 수술 실적 뒤에 감춰진 환자 안전에 대한 경고였다. 프로비던스는 이미 2022년 불필요한 척추수술 비용을 미국 정부의 의료보장 프로그램에 부당하게 청구했다는 의혹으로 약 2269만 달러를 지급하는 데 합의한 바 있다. 당시 병원 측은 소속 의료진이 드레이어와 또 다른 신경외과 의사 대니얼 엘스켄스(Daniel Elskens)의 수술에 대해 환자 안전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의료진이 당시 지적한 문제는 수술 후 과도한 합병증과 좋지 않은 치료 결과, 수술 대상자로 적합하지 않은 환자에 대한 수술, 부정확한 진료기록 등이었다. 드레이어에 대해서는 진단명을 과장하거나 허위로 기록하고, 의학적으로 필요한 범위를 초과한 복잡한 수술을 시행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프로비던스는 2018년 5월 드레이어를 직무에서 배제했지만, 같은 해 11월 사직을 허용했다. 이 과정에서 병원은 관련 사실을 미국 의료인 징계·과실 정보 관리체계인 국가의료인정보은행(NPDB)이나 워싱턴주 보건당국에 신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드레이어는 이듬해(2019년) 멀티케어 산하 디코니스병원에 다시 채용됐다. 멀티케어의 채용 과정에서도 이전 병원에서 제기된 문제를 둘러싸고 경고가 있었지만, 채용은 그대로 진행됐다.
미국 워싱턴주 스포캔에 위치한 멀티케어 디코니스병원 전경. [사진=위키미디어 공용]환자 안전을 우려하는 의료진의 문제 제기는 새 병원에서도 지속됐다. 미국 법무부가 올해 2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드레이어와 함께 수술하던 의사보조인력 두 명이 병원 경영진에게 드레이어의 위험을 알렸다.
한 명은 환자가 다칠 수 있다는 우려로 수술 도중 수술실을 떠났고, 다른 한 명은 드레이어와 계속 일할 경우 환자에게 위해가 발생할 것을 걱정해 병원을 그만뒀다. 그러나 멀티케어는 드레이어의 수술을 중단하거나 제한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은 수술 건수와 복잡성에 연동한 보수체계를 유지했다. 미국 정부와 드레이어의 합의 문서에 따르면 멀티케어는 의사의 업무량을 수치화한 상대가치단위(wRVU)를 기준으로 보수를 지급했으며, 실적에 따른 보수에는 상한선이 없었다. 드레이어는 2020년 멀티케어에서 170만 달러가 넘는 보수를 받았다.
드레이어는 2021년 3월 워싱턴주 당국으로부터 척추수술 시행을 제한하는 행정처분을 받았고, 그 해 11월 멀티케어를 떠났다. 드레이어에 의한 수술이 예정돼 있던 환자 12명을 다른 신경외과 의사가 재평가한 결과, 12명 모두 수술 대상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나왔다는 내용도 미국 정부가 제기한 소송 자료에 포함됐다.
정부와 잇단 합의 이어 환자 집단소송까지…병원 두 곳 거액 배상
이후 정부 차원의 의료비 부정청구 조사와 환자들의 집단소송이 이어졌다. 프로비던스는 2022년 불필요한 신경외과 수술 등에 대한 부정청구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약 2269만 달러를 미국 정부에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드레이어 역시 2023년 약 120만 달러를 지급하는 별도 합의를 체결했다.
멀티케어는 올해 2월 환자 안전을 위협하고 불필요한 척추수술 비용을 연방 의료보장 프로그램 등에 부정청구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372만 8000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법무부는 "당시 병원이 의료진의 경고와 구체적인 위험 징후를 알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번 1억 5550만 달러 합의는 정부에 지급한 기존 합의금과 별개로,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환자 측 변호인에 따르면 해당 의사에게 치료받은 환자는 기본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며,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수술로 판단된 사례는 별도의 전문의 검토를 거쳐 추가 보상이 이뤄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