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생성 이미지)[헬스코리아뉴스 / 이창용] 매출이 과거에 거둔 훈장이라면, 재고자산은 미래의 현금 흐름을 결정짓는 예고표다. 헬스코리아뉴스가 매출액 기준 국내 상위 10대 제약사의 2025년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각 기업은 재고의 '회전 속도'를 높이거나 '선제적 손실 반영'을 통해 저마다 정교한 수익성 방어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신약의 글로벌 흥행과 원료 비축 규모에 따라 기업별 재고자산 운용 전략의 색깔이 선명하게 갈리는 양상이다.
SK바이오팜·대웅·동국제약, 창고 머물 틈 없는 '빛의 회전율'
재고 관리의 이상향은 제품이 생산되자마자 바로 시장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부문에서 가장 돋보이는 기업은 SK바이오팜이다. 이 회사는 평가충당금 총액이 전년 대비 20.3% 감소했다. 특히 글로벌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Cenobamate, 제명명: 엑스코프리·XCOPRI, 유럽 제품명: 온투즈리·ONTOZRY))'의 돌풍에 힘입어 완제품에 대한 평가충당금은 2024년 약 7000만 원에서 2025년 '0원'으로 마법처럼 사라졌다. 이는 창고에 쌓인 자산이 정체 없이 전량 현금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용어설명
①제품(유동제품): 회사가 직접 만든 '완제품'이다. 이 비중이 높을수록 이익률이 좋다.
②평가충당금: 특정 자산의 장부가액을 실제 회수·실현 가능한 가치(시가)로 낮추기 위해 미리 설정하는 충당금으로, 재고자산의 경우 '재고평가충당금'이라고 한다. 즉, 시장가가 하락해 원가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있을 때 그 차액만큼 비용(평가손실)으로 인식하고, 장부상 재고자산을 낮춰 재무제표의 과대평가를 방지하는 장치다. 이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빠른 회전을, 늘어나는 것은 리스크를 미리 관리함을 의미한다.
대웅제약과 동국제약의 공급망 관리(SCM) 역량도 매섭다. 대웅제약은 전체 재고 물량을 21.2% 늘렸음에도 폐기 리스크를 뜻하는 평가충당금은 오히려 11.2% 줄였다. 물건은 많이 쌓아두되 회전 속도를 높여 자산의 질을 개선한 것이다. 동국제약 역시 재고를 10% 늘리면서 충당금 설정률은 0.8% 수준으로 묶어뒀다. 이는 창고에 1000원어치 의약품이 있다면 위험 자산이 단 8원뿐이라는 뜻으로, 창고 자산의 99.2%가 즉시 현금화 가능한 '특A급' 자산이라는 방증이다.
헬스코리아뉴스가 매출 상위 국내 10대 제약사의 2025년 사업보고서를 토대로 재고자산 관리 현황을 분석한 결과, 각 기업은 저마다의 '경영 전략'에 따라 재고 운용 방식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왼쪽) SK바이오팜, 대웅제약, 동국제약 등은 글로벌 신약의 흥행과 탄탄한 공급망을 기반으로 재고의 회전율을 극대화하는 'SPEED'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특히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Cenobamate)'는 완제품 평가충당금이 0원으로, 창고에 쌓일 틈 없이 전량 현금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른쪽) 반면 GC녹십자와 종근당 등은 미국 시장 진출을 앞둔 혈액제제 신약 '알리글로(Alyglo)'의 원료 비축과 선제적 리스크 반영을 통해 미래 수익을 극대화하는 'STRATEGIC STOCKPILING' 전략에 주력하고 있다. 당장 장부상 비용은 늘어나지만, 향후 판매 시 수익성을 높이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전략이다.
(하단) 유한양행의 '안정적 SCM', 한미약품의 'R&D 기반 자체 제조', JW중외제약의 '제조 기반 내실 경영', 보령의 '자산 효율화' 등 각 사의 특색 있는 재고 관리 방식이 요약되어 있다. [그래픽=헬스코리아뉴스 AI 인포그래픽 생성]GC녹십자·종근당·동아ST, '신약' 비축과 '리크스 선반영' 전략
GC녹십자는 미래를 위한 '기분 좋은 비축'을 택했다. 원재료 비축량을 1년 새 55%나 늘렸는데, 미국 시장 공급을 앞둔 혈액제제 신약 '알리글로(Alyglo)'의 대량 생산을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대규모 원료 확보에도 충당금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며 글로벌 시장 안착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종근당과 동아ST는 '매도 먼저 맞는' 전략을 구사했다. 종근당은 재고를 21.1% 늘리는 동시에 평가충당금을 50%나 증액했고, 동아ST는 충당금을 전년 대비 140%나 넉넉히 잡았다. 당장 장부상 비용은 늘어나지만, 향후 이 재고들이 판매될 때 이미 비용 처리가 끝난 상태라 수익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전략이다.
유한·한미·JW중외, '안정적 공급망'과 'R&D 명가' 자부심 유지
업계 1위 유한양행은 10대 제약사 중 유일하게 한 자릿수 재고 증가율(8.63%)을 기록하며 기복 없는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무리한 확장보다는 기존 공급망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리스크를 방어하는 '수성' 전략이다.
한미약품은 'R&D 명가'답게 전체 재고 중 남의 제품을 떼다 파는 '상품' 비중이 단 3.3%에 불과했다. 직접 개발한 제품 위주로 재고를 운용하며 유통 과정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 JW중외제약 역시 수액제 등 필수 의약품을 중심으로 자체 제조 제품 비중을 50% 수준으로 유지하며 제조 기반의 내실 경영을 증명했다.
보령, '묵은 때' 벗기고 자산 효율성 극대화
보령은 10대 제약사 중 드물게 재고 총량을 4.3% 줄이면서 1년 새 전체 평가충당금은 21.6%나 걷어냈다. 이는 장부상 리스크로 잡혀있던 낡은 자산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그 자리를 즉각 현금화가 가능한 '신선한 재고'로 채워 넣었음을 의미한다.
업계 관계자는 25일 헬스코리아뉴스와의 통화에서 "최근 제약사들의 재고자산 운용은 과거의 단순한 물량 확보 방식에서 벗어나, 글로벌 신약의 흥행 여부나 선제적 리스크 관리 등 각 사의 경영 전략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특히 신약 출시를 앞둔 기업들의 전략적 비축과 기존 품목의 회전율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향후 기업의 현금 흐름과 수익성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매출액 상위 10대 제약사 2025년 재고 규모]
기업명
재고규모(단위:억 원)
재고 증감률
평가충당금 증감률
유한양행
3727
8.6%
4.2% 증가
녹십자
8915
20.3%
1.4% 감소
종근당
4286
21.1%
50.1% 증가
대웅제약
3108
21.2%
11.2% 감소
한미약품
3385
12.5%
5.1% 증가
보령
2194
-4.3%
21.6% 감소
동국제약
1752
10%
4.3% 증가
JW중외제약
1098
-1.6%
2.3% 증가
동아에스티
1624
14.6%
140% 증가
SK바이오팜
1002
-10%
20.3% 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