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 치매 환자 [출처=Education for Rural and Underserved Communities 유튜브 영상][헬스코리아뉴스 / 이충만] 미국 릴리(Eli Lilly)가 자사의 알츠하이머(치매) 치료제 '키순라'(Kisunla, 성분명: 도나네맙·donanemab)의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진단 신기술 확보에 발빠르게 나서고 있다.
최근 릴리가 개시한 임상시험을 통해 그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시험은 경도 아랍 에미리트에서 인지장애를 가진 성인을 대상으로 망막 영상을 검사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시험기관을 한 번 방문하여 망막 검사를 받는다.
이때 망막 검사는 캐나다 레티스펙(RetiSpec)이라는 바이오 벤처 기업이 개발한 장비를 활용한다. 장비의 이름은 업체의 이름과 동일한 '레티스펙'이다.
'레티스펙'은 인공지능(AI) 기반 소프트웨어다. 알츠하이머 발병과 관련된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 축적 수준을 망막 검사만으로 예측하도록 설계되었다. 매우 획기적인 장비인 셈이다.
릴리는 이 장비를 활용하기 위해 지난 2024년 7월 레티스펙이 유치한 최대 1000만 달러(한화 약 146억 원)의 시리즈 A 투자 라운드에 신규 투자자로 참여하며 '레티스펙'의 라이선스 권한을 확보한 바 있다.
당시 참여한 투자 기업들은 대부분 의료기기 업체 혹은 대학 연구소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릴리가 빅파마로서 유일하게 '레티스펙'의 투자에 참여한 것이다.
이는 릴리의 알츠하이머 치료제 '키순라'가 진단 문제로 인해 의약품 판매에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키순라'는 알츠하이머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을 표적하는 항체 약물이다. 올해 7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허가를 취득했다.
'키순라'를 비롯한 베타 아밀로이드 항체 약물은 그간 대증요법에 그쳤던 치매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의료계는 베타 아밀로이드 항체 약물의 부작용을 우려하며 투약 조건을 제한하고 있다. 환자가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검사를 통해 베타 아밀로이드가 실제로 뇌에 축적되었는지를 확인 받아야 베타 아밀로이드 항체 약물을 투약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는 적지 않은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우선 PET 검사의 경우 일반적인 병원에서 받는 CT 촬영과 달리 훨씬 복잡하고 침습적인 절차를 요구한다. 예컨대 환자는 방사성 추적자(아래 용어설명 참조)를 정맥으로 투여받고, 체내에 고르게 분포되도록 기다린 뒤에야 PET 검사를 통해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 축적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미국 기준 1회 PET 검사 비용은 최대 7275 달러(약 1068만 원)에 달한다. 미국 보험사는 고가의 PET 검사를 거쳐야 투약할 수 있는 베타 아밀로이드 항체 약물보다 값싼 기존의 인지기능 개선제를 선호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베타 아밀로이드 항체의 상용화는 업계의 기대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릴리의 '키순라'는 일본 에자이(Eisai)의 베타 아밀로이드 항체 약물 '레켐비'(Leqembi, 성분명: 레카네맙·lecanemab) 보다 2년 이상 늦게 미국 FDA의 허가를 받은 후발주자다. 따라서 릴리 입장에서는 베타 아밀로이드 항체 약물의 상용화를 지연시키는 이러한 까다로운 진단 절차를 한시라도 빨리 완화할 필요가 있었고, 바로 이때 '레티스펙'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투자 유치와 기술의 독점 권한은 별개의 문제다. 이론적으로는 일본 제약사 에자이(Eisai)도 '레티스펙'을 활용해 자사 알츠하이머 치료제 '레켐비'의 상용화를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벤처 기업은 당연히 투자자에게 더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레티스펙'이 성공적으로 상용화된다면, 릴리는 상당 기간 해당 기술을 독점할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환자는 PET 검사를 거쳐야 투약 가능한 '레켐비'보다 시력 검사 한 번으로 투약할 수 있는 '키순라'를 선호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방사선 추적자(radioactive tracer)란
방사능을 띤 물질을 아주 소량 사용하여 물질의 이동 경로나 생체·화학적 변화를 추적하는 데 쓰는 물질이다. 다시말해 방사선 추적자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포함된 화합물로, 물질의 이동·변화·대사 과정을 방사능 측정을 통해 정밀하게 추적하는 데 사용되는 물질을 말한다. 화학, 생물, 환경,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물질의 거동, 대사, 체내 분포, 질병 진단 등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추적자를 활용하면 물질 자체의 성질은 거의 달라지지 않고도 자연스러운 생체·화학적 반응을 관찰할 수 있다.